[교황님 미사 강론] 2020년 4월 19일 주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관리자 | 2020-04-27 | 조회 1675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전례 기념 거룩한 미사
사시아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
2020년 4월 19일 부활 제2주일
지난 주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제자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뵌 지 일주일,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문이 다 잠겨”(요한 복음 20,26) 있는 뒤에서 위축되어 부활 때에 없었던 유일한 사람 토마스를 확신시키지도 못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겁 많은 믿음의 부족 앞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분께서는 돌아오시고 그리고 같은 곳 제자들의 “가운데에” 서시며 당신의 인사를 반복해서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복음, 20,19.26).
그 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 분 제자의 부활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이 진실하고 인내하시는 자비에서 시작되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넘어질 때 우리에게 손을 뻗는 것에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을 셈을 치러야 하는 엄격한 주인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일으키시는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가 보기를 그분께서 바라십니다. 삶에서 우리는 몇 걸음 걷다가 넘어지는 아기같이 머뭇거리면서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몇 걸음 더 그리고 다시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기의 아버지는 그 아기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언제나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그 손은 자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없다면 우리가 계속 바닥에 주저 앉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즉, 계속 걷기 위해서 우리는 일으켜 세워져야만 합니다.
당신은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넘어져 있을래요!”. 주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시고 그리고 그분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실패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기를 그분께서는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넘어질 때 그분께서는 일으켜 세워져야 하는 아이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실패들 속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자비하신 사랑이 필요한 아이를 보십니다.
오늘 로마 자비의 성지가 된 이 교회에서 그리고 20년 전 성 요한 바오로2세가 하느님 자비에 봉헌하신 이번 주일에 이 교회에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 메시지를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랑과 자비 그 자체이다. 어떤 비참함도 나의 자비보다 클 수는 없다.”(일기, 1937년 9월 14일). 한번은 파우스티나 성녀가 만족스럽게 예수님께 자신이 자기 삶의 전부를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분께 봉헌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즉, “너는 진짜 너의 것은 아직 나에게 주지 않았다”. 거룩한 수녀는 혼자 힘으로 무엇을 계속 해 왔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너의 비참함을 나에게 다오”(1937.10.10). 우리도 또한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비참함을 주님께 드렸나? 나는 그분께서 나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내가 넘어지는 것을 보시도록 해 드렸을까?” 아니면 내가 아직도 계속 나 자신 안에 두고 있는 어던 것이 있는가? 죄, 과거로부터 오는 후회, 내가 내면에 안고 있는 상처, 누군가에게 갖고 있는 원한,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생각…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경험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부족함들을 봉헌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제자들에게 돌아갑시다. 그들은 그분의 수난 때에 주님을 버렸고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긴 설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면에 상처를 입은 그들에게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 주십니다. 토마스는 이제 그것들을 만질 수 있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버렸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상처들 안에서 그는 자신의 손으로 하느님께서 다정하게 가까이 계심을 만집니다. 토마스는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가 자비를 받자마자 그는 다른 제자들을 앞섰습니다. 그는 부활뿐 아니라 하느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 28). 여기에 그 제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약하고 상처 받은 인성이 예수님의 인성으로 들어 올 때 이루어집니다. 거기에서 모든 의심이 풀립니다.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시련의 때에 우리도 또한 토마스처럼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의심을 가지고 우리의 나약함을 체험해 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나약함을 넘어 누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 속에서조차도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재발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약하고 동시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탈 같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만약 크리스탈 같이 우리가 그분 앞에서 투명하다면 그분의 빛 –자비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질 것이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비추어질 것입니다. 베드로의 서간이 말하듯이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베드로 1서 1,6).
이 하느님 자비 주일에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가 늦게 도착한 제자, 토마스에게서 나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없었던 단 한 명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토마스를 기다리셨습니다. 자비는 뒤처진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코로나 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부터 느리고 고된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뒤처진 사람들을 잊을 위험이 있습니다. 위험은 우리가 그때에 훨씬 더 나쁜 바이러스, 이기적인 침묵의 바이러스에 압도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더 좋다면 삶이 더 나은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나에게 좋다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의해 퍼지는 바이러스. 그것은 거기에서 시작되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그리고 전진의 제단 위에 남겨진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사람대신 한 사람을 선택하고 맙니다. 그러나 현재의 코로나 19의 세계적 대유행은 고통 받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모두 평등하고 모두 소중합니다. 우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에 깊이 흔들리게 해 주소서.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 전체 인류 가족의 건강을 약화시키는 불의함을 치유하기 위해서 때가 왔습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부터 배웁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비를 받았고 자비와 함께 살았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행전 2,44-45). 이것은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 공동체 안에서 오로지 한 사람이 뒤쳐졌고 다른 사람들은 기다렸습니다. 오늘날에는 반대인 것 같습니다. 대다수가 뒤쳐져 머물고 있는 동안 인류 가족의 작은 부분이 앞서 나가 왔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 복잡한 문제들이에요,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신경 써야 해요!” 파우스티나 성녀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고통을 받는 한 영혼 안에서 우리는 기생충이나 짐덩어리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의 행위를 할 기회를 주시고 우리는 그 기회를 남을 판단하는 기회로 이용합니다.”(일기 1937년 9월 6일). 그러나 그녀 자신이 하루는 예수님께 사람이 자비로울 때 순진하다고 여겨진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주님, 그들은 나의 선함을 악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그것이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해라. 그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자비로워라.”(1937년 12월 24일).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이익, 우리의 기득권만을 생각하지 맙시다. 이 시련의 때를 우리 공통의 미래,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는 모두를 위한 미래를 준비할 기회로 맞이합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비전 없이는 어느 누구를 위한 미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그 소박하고 무장해제시키는 사랑이 그분 제자의 마음을 되살리십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자비, 세상의 구원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향해 자비를 보여줍시다.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역 : 정진영 프란체스카(최종 번역 날짜와 시간 2020. 4. 24. 19:12)
강론영어원문 ->http://w2.vatican.va/…/papa-francesco_20200419_omelia-divin…
교황님 미사 동영상 & 사진 -> http://w2.vatican.va/…/va…/en/2020/4/11/veglia-pasqua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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