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 미사 강론 ] 2023년 4월 2일 주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관리자 | 2023-04-07 | 조회 565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기념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 베드로 대성당
2023년 4월
2일 주일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 복음 27, 46). 이것이 오늘의 전례가 우리에게 화답송에서 반복하도록
했던 부르짖음이고(시편 22:2 참조),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부르짖음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수난의 핵심,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견디셨던 고통의 절정으로 우리를 데려가 줍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의 고통들이 많았고 우리가
수난기를 들을 때마다 그 고통들이 우리를 관통합니다. 몸의 고통들이 많았습니다.
손찌검과 구타, 채찍질과 가시관을 씌움,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잔인함. 또한 영혼의 고통들이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과 도시의 지도자들의 심판, 군사들의 조롱, 십자가 밑에서 하는 야유, 군중들의
거부, 모든 것의 실패, 제자들의 도망. 그런데
이 모든 슬픔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한가지 확실함 안에 머무르셨습니다. 바로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가까우심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께서 부르짖으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예수님의 버려짐.
이것이 모든 고통 중에서 가장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영혼의 고통. 그분의 가장 비극적인 시간에 하느님에게서
버려짐을 경험하십니다. 그 전에 그분께서는 “하느님”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의
강력함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 말씀도 아람어로 그 문장을 기록합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원어로 우리에게 전해진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실제 사건은 성부께 버려지시면서 하느님께 버림 받는 극단적인 낮아짐(실추, 굴욕)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우리를 위한 사랑을 껴안으셨는지 이해하는 것조차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시고, 그분께서 당신 자신이
그 고통스러운 삶의 가장 자리, 삶의 난파, 확실성의 붕괴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부르짖으십니다. “어찌하여”. 다른 모든 “어찌하여”를 껴안으시는
“어찌하여,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성경에서
“버리 다”라는 말은 강력합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고통의 순간에 그 말을 듣습니다. 즉, 실패한 사랑 또는 거절당하거나
배반당한 사랑. 거부되고 낙태된 아이들. 관계가 끊어지는 상황들 속에
있는 과부와 고아들의 삶. 사회의 배척과 불의함과 압제의 형태들 속에서 파괴된 결혼. 병든 이들의 외로움. 결국, 관계의 처절한
끊어짐 안에서. 거기에서 이 말이 말하여집니다. “버려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 지시면서 이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에서 외아드님이시고 성부의 사랑 받는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존재에서 완전히 외면 당하는 상황을 경험하셨습니다. 즉 버려짐, 하느님과 멀어짐[을 경험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른 답이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이것은 단순히 어떤 공연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이들은 예수님의 버려짐을 들으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이 버려짐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값입니다. 그분께서 철저하게[끝까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극도로 결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절망의 포로로 놓아두지 않으시려고
우리 곁에 머무르시려고 버려짐을 겪으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나 나 또는 다른 누구이든지 벽에 등을 대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길을 잃고 버려짐의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대답 없는 수많은 “왜[어찌하여]”의 회오리속에 빨려 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볼 때 한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분 너를 위한, 또 나를 위한.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고 그리고 지금도 당신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멀리 있음을 당신의 사랑 안에 담아 내시려고 버려짐의 멀어짐을 고통으로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실패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많이 실패해 왔습니다. 나의
고립감 안에서 내가 배반당했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을 배반했을 때, 내가 거부당했다고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을
거부했을 때, 내가 버려졌거나 다른 사람들을 버렸을 때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버려
지셨고 배당하셨고 거부되셨던 분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내가 잘못했고 길을 잃었을 때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대답 없는 수많은 나의 왜(어찌하여) 안에
거기에 그분이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들의 “왜”의 뒤편에서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곳으로부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을 열어
내십니다. 사실 십자가 위에서 극단적인 버려짐을 겪으시면서 당신 자신을 절망으로 향하게 두지 않으시고 – 이것이 한계 그 끝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시고 당신 자신을 의탁하십니다. 시편(22,2)에 있는 당신의 “어찌하여”를 울부짖으시고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루카
복음 23,46 참조) 그분께서 아무리 멀리 있다고 느끼더라도 또는
오히려 당신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껴지는 것 말고는 아무도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버려짐 안에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의탁하십니다. 버려짐 안에서 그분께서는 그분을 혼자 버려 두었던 제자들을 계속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버려짐 안에서 그분은 그분을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v. 34). 여기서
결국 우리의 고립이 친교가 되어가면서 위대한 사랑 안에 잠기는 우리의 수많은 악들의 심연을 우리가 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은 이렇게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이고, 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은 돌로 된 우리의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시고 다정하신 사랑이시고 연민의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버려 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움직이시어 버려진
사람들 속에서 당신을 찾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단지 가난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 버려진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들의 인간 조건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께서 계십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버려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오로지 버려진, 주랑 밑에서 죽은 독일어로 소위 “거리의” 사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가까움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버려진 이들이. 나도
예수님께서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에게 가까이 와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버려진 사람들
속에 외로운 사람들 속에 계신 그분을 찾으러 갑니다. 그분께서는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을 겪는 그분과 가장 닮은 형제들과 자매들을
우리가 돌보기를 열망하십니다. 오늘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많은 “버려진 그리스도들”이 있습니다. 착취당하고 버려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거리에서
살고 있고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더 이상 얼굴이 아닌 그저 숫자들인 많은 이민자들이 있습니다. 단절된 갇힌 이들이 있습니다. 문제들이라고 실패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셀 수 없는 다른 버려진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고 숨겨지고
흰 장갑들 속에서 버려집니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홀로 사는 노인들. 즉 그들은 어쩌면 당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요양원에 홀로 버려진 당신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병자들, 무시당하는 장애인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을 들어줄 준비가 되지 있지 않은 내면의 커다란 공허함에 짓눌리는 젊은이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살 밖에는 다른 길을 찾지 못합니다. 우리
시대의 버림받은 이들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버려짐 안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눈과 마음을 버려진 이들 모두에게 열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버려진” 주님의
제자들로서 어떤 남자 여자 또는 어떤 아이들도 쫓겨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 자신 또는
그녀 자신 홀로 버려질 수 없습니다. 거부된 이들과 배척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무모한 사랑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를
모든 형태의 외로움과 고립에서 구하신 그분의 버려짐을 기억하게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그분의 은총을 간구합시다. 버려짐 안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은총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버려진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그들 안에서 계속해서 부르짖으시는
주님을 바로 알아보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무관심의 귀먹은 침묵 속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외롭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이들을 돌봅시다. 그때 오로지 그때 우리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비우”(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7)신
한 분과 한 마음 한 정신이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완전히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번역 정진영 프란치스카 2023. 4. 5. 수요일
10:21)
강론영어원문->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3/documents/20230402-omelia-palme.html
강론 이탈리아어 원문->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23/documents/20230402-omelia-palme.html
강론 미사 사진 동영상(이탈리아어) ->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it/2023/4/2/palme.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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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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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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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odbbang.com/ch/1771273(->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